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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美壽)중국 역사 대장정 #4-3][베이징]원명원(圆明园),

화평지인 2026. 6. 25. 08:46

[이전 편] 베이징 이화원 후편 여행기 보러가기  https://peaceofman.tistory.com/37

 

[미수(美壽)중국 역사 대장정 #4-2-2][베이징]이화원(颐和园)-2

[이전 편] 베이징 이화원 1편 여행기 보러가기 이화원 전편에 이어서 계속 이어집니다. 웅장한 건축물은 명실상부한 이화원의 중심이자 최대 랜드마크인 불향각(佛香阁, Foxiangge)입니다.만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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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원(圓明園)
이렇게 이화원을 구경하고 나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원명원을 가기 위해 공유자전거를 타고 네비게이션을 자전거에 거치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청나라 황제들이 자금성(자금성)이라는 좁고 답답한 궁궐을 벗어나 원명원(圓明園)과 같은 거대한 정원을 짓고 그곳에서 말 타기와 사냥, 군사 훈련을 끊임없이 했던 것에는 "기마민족으로서의 본능과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강력한 정치적·문화적 의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 원명원의 역사적 사실


1. 자금성은 만주족에게 '거대한 감옥'이었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주인이 된 청나라 황제들에게 베이징의 자금성은 그리 매력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답답한 격식과 더위: 대대로 넓은 만주 벌판과 숲을 말을 타고 달리며 수렵 생활을 하던 만주족에게, 사방이 높은 붉은 벽으로 막히고 나무 한 그루 없이 전각만 빽빽한 자금성은 숨이 막히는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에는 엄청나게 덥고 습했습니다.

기마민족의 정체성 위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는 소수의 만주족이 거대한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우리 민족 고유의 상무(尙武) 정신(무예를 숭상하는 정신)을 잃으면 청나라는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금성에 안주하다가 한족의 안락한 문약(文弱)에 물들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죠.


2. '말을 달리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정원, 원명원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금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조성을 시작한 것이 바로 원명원입니다. 원명원은 단순한 휴식용 정원이 아니라, 황제가 말 위에서 정무를 보고 군사를 훈련하던 '지상 위의 거대 제국'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 원명원(원명원, 장춘원, 기춘원 삼원 합칭)의 전체 면적은 약 350헥타르(3.5㎢)에 달했습니다. 이는 축구장 약 500개에 해당하는 크기이며, 현재 우리가 아는 자금성 면적의 5배에 육박합니다.

정원 안의 사냥터와 목장: 이 드넓은 부지 안에 수많은 인공 호수와 산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드넓은 초지와 평지를 조성했습니다. 황제들과 황실 자제들은 이곳에서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습관(기사, 騎射)을 유지했고, 군사들의 기마 사격 훈련을 직접 사열하기도 했습니다.

​제2의 자금성: 황제들은 1년 중 대부분을 자금성이 아닌 이 원명원에 머물며 정무를 보았습니다. 즉, 말 위에서 정치를 펼치던 그들의 조상처럼, 탁 트인 대자연 속에서 나라를 다스린 것입니다.

3. "말에서 내리는 순간 망한다" – 황제들의 지독한 경고
건륭제는 원명원뿐만 아니라 베이징에서 더 멀리 떨어진 청더(승덕)에 '피서산장'을 짓고, 매년 가을마다 황실 군대를 이끌고 '목란위장'이라는 거대한 야생 사냥터로 떠나 몇 달씩 텐트를 치고 사냥을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신하들과 자식들에게 "우리가 말을 타고 달리는 법을 잊고 한족처럼 가마나 타고 글만 읽는 순간, 청나라의 국운은 끝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청나라 말기 황제들이 약해져 원명원과 사냥터에서 말을 타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내게 되면서 청나라는 급격히 쇠퇴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원명원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야사가 아니라, 기마민족의 야생성을 유지하여 제국을 지키고자 했던 청나라 황제들의 치밀한 '정체성 보존 전략' 이었습니다.  '만원의 원(萬園之園)'이라 불릴 만큼 끝이 보이지 않던 그 넓은 평원과 호수들은, 만주족 황제들이 잃고 싶지 않았던 고향의 드넓은 산하를 베이징 근교에 그대로 옮겨놓은 거대한 향수병의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뼈아픈 파괴를 겪은 원명원의 역사와, 그 아픔을 딛고 인재를 양성해 국력을 키우겠다는 중국의 결연한 의지를 담은것이 바로 다름 아닌 중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명문대로 꼽히는 베이징대학(北京大學)과 칭화대학(清華大學)입니다.

 실제로 이 두 대학의 캠퍼스는 부지 자체가 청나라 황실 정원의 일부였거나 원명원과 바로 맞닿아 있으며, 여기에는 중국 근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아픔과 다짐이 서려 있습니다.


1. '만원의 원(萬園之園)'이 철저히 불타버린 아픔
원명원은 청나라 황제들이 150년에 걸쳐 동양의 정통 조경과 서양의 바로크 양식(서양루 구역)까지 조화롭게 융합해 만든,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궁전 정원이었습니다.

1860년의 비극 (제2차 아편전쟁):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침공한 뒤, 청나라 조정에 가장 치욕적인 고통을 주고 보복하기 위해 황제가 가장 아끼던 공간인 원명원을 표적 삼아 철저하게 불살라 버렸습니다.

무려 3일 밤낮 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았으며, 영프 연합군 군인들은 정원 안의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약탈했습니다. 이때 완전히 전소되어 오늘날 우리가 원명원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은 불에 타지 않고 남은 '서양루(석조 건축물)'의 처참한 대리석 기둥 잔해들뿐입니다.



2. 원명원의 비극 위에 세워진 '칭화대'와 '베이징대'
중국은 이 치욕적인 사건을 '국치(國恥: 나라의 수치)'로 규정하고, 세대를 이어 결코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의 현장 바로 옆에 나라를 이끌어갈 최고의 천재들을 모아놓은 대학들을 배치했습니다.

칭화대학 (清華大學): 칭화대의 캠퍼스는 원래 원명원 부속 정원 중 하나였던 '희춘원(熙春園)'이었습니다. 원명원이 불탈 때 함께 파괴되었던 황실 정원 부지를 활용해 대학을 세운 것입니다.

베이징대학 (北京大學): 베이징대의 아름다운 캠퍼스(연원) 역시 과거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숙춘원(淑春園)' 부지입니다. 원명원 바로 남쪽에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 서구 열강의 대포와 불길에 처참하게 짓밟혔던 황실 정원의 터가,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술과 학문을 연구하는 중국 최고의 과학·인문학 인재들의 요람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3. "과학기술로 국치를 씻는다" – 젊은 엘리트들의 다짐
중국 대학생들과 인재들에게 원명원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국력이 약하면 언제든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가장 생생한 시각적 역사 교육장입니다.

역사 교육의 성지: 실제로 베이징대와 칭화대 학생들은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원명원의 폐허를 수시로 보며 자랍니다. 중국 정부는 원명원을 완벽하게 복원하지 않고 고의로 그 파괴된 잔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젊은 학생들에게 "과거의 약소국이었던 아픔을 기억하고, 학문과 기술을 갈고닦아 다시는 이런 비극을 허용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기 위함입니다.

중국이 오늘날 우주항공,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 과학기술에 사활을 걸고 인재를 기르는 원동력의 뿌리에는, 바로 이 원명원 앞마당에서 다짐한 엘리트들의 '부국강병(富國强兵)' 의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결어( 結語 ):  가장 화려했던 문화의 정점(원명원)이 서구의 무력에 처참하게 무너진 자리에, 중국은 "지식과 기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 며 최고 명문대들을 세웠습니다. 파괴된 돌기둥만 남은 원명원 서양루 폐허를 바라보며 걷는 여정은, 중국이 왜 그토록 강대국이 되기 위해 집착하는지 그들의 '지독한 역사적 결의'를 온몸으로 느끼는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원명원의 상세 내용

만화진(万花阵, Wanhuanzhen)

원명원 내부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명소이자, 비극적인 파괴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황실의 대리석 미로인 만화진(万花阵, Wanhuanzhen) 혹은 황화진(黄花阵)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조금 전 나눈 이야기처럼 서구 열강의 방화로 원명원의 수많은 목조 전각들이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졌을 때, 이곳은 오직 단단한 돌(벽돌과 대리석)로만 지어졌기에 이처럼 온전한 형태의 석조 정자와 미로 성벽을 남겨둘 수 있었습니다. 

1. 정원 속에 만든 대리석 미로 게임장
이곳은 청나라 건륭제 시절, 서양식 건축 구역인 '서양루(西洋樓)'를 지을 때 함께 조성된 유럽식 기하학 미로 정원입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미로 정원을 모티브로 삼아 중국 황실의 감각을 더해 완성했습니다.

황제의 유희: 높이 약 1.2미터가 넘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회색 벽돌 벽이 사방으로 구불구불하게 미로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추절(추석) 밤이 되면, 황제는 이곳에 수많은 궁녀와 시종들에게 노란 등불을 들고 미로 속을 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로를 가장 먼저 통과해 사진 중앙에 보이는 중심 석조 정자에 도달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며 연회를 즐겼던 왕실의 호화로운 놀이터였습니다.

2. 동양과 서양이 융합된 최고의 석조 정자
미로의 종착지이자 정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백색 정자는 동서양의 건축 미학이 절묘하게 결합된 걸작입니다.

바로크와 청나라의 만남: 정자의 전체적인 외관과 둥근 돔형 지붕, 그리고 정자를 받치고 있는 화려한 조각 기둥들은 서양의 바로크·로코코 양식을 강하게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붕 처마 끝이 하늘을 향해 살짝 들린 모습이나 세부적인 문양에는 중국 전통 건축의 터치가 고스란히 살아있어, 당시 청나라가 받아들인 서양 문물의 정수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3. 완전 복원의 역사와 '국치'의 기억
사실 이 만화진 역시 1860년 영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정자의 지붕이 무너지고 벽들이 크게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기적의 복원: 하지만 다른 목조 건물들과 달리 기초 석축과 미로의 벽돌 라인이 워낙 단단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1987년에 과거 설계도와 남아있던 잔해를 바탕으로 원명원 내에서 유일하게 이 미로 구역과 정자를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게 완벽하게 복원해 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수백 년 전 청나라 황제와 궁녀들이 했던 것처럼 실제로 저 회색 미로 벽 사이를 헤매며 중앙의 대리석 정자로 올라가는 독특한 역사적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중국의 의지와, 서구 열강조차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했던 청나라 석조 건축의 위엄이 서린 곳입니다

1. 해기취(海晏堂) 뒤편의 석조 기둥들
공간 설명: 이 거대하고 높은 사각형 대리석 기둥들은 당시 원명원 내에서 가장 큰 서양식 건물이자 거대한 분수대가 있었던 해안당(海晏堂) 혹은 그 주변 전각의 잔해입니다.

감상 포인트: 나무로 된 지붕과 벽면은 불타 없어졌지만, 건물을 지탱하던 서양 바로크식 대리석 기둥들이 앙상한 뼈대처럼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습니다. 기둥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유선형 조각들이 당시 이 건물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2. 대수법(大水法)의 거대 분수대 유적
공간 설명: 사진 우측에 보이는 거대한 조개껍데기 모양의 석조물이 바로 원명원 서양루의 상징인 대수법(大水法) 분수대의 핵심 부속입니다. '수법(水法)'은 중국어로 분수를 뜻합니다.

감상 포인트: 당대 최고 기술을 동원해 서양식 수압 장치로 물을 뿜어내던 거대 분수 시설이었습니다. 지금은 물이 흐르던 수로와 석축이 완전히 깨지고 잡목이 우거진 폐허가 되었지만, 정교하게 깎인 조개 모양의 석조 장식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옛날의 정취를 전합니다.

3. 방외재(方外齋) 혹은 관수법 주변의 무너진 벽면
공간 설명: 웅장한 대리석 블록들이 마치 요새의 성벽처럼 층층이 쌓여 있고, 그 앞뒤로 부서진 석조 조각들이 뒹굴고 있는 모습입니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이슬람 출신 후궁인 '향비(香妃)'가 예배를 보던 이슬람풍 서양 건물인 방외재(方外齋) 혹은 그 주변의 벽체입니다.

감상 포인트: 완벽한 직선으로 맞물려 있던 거대한 대리석 벽들이 서구 열강의 폭파와 방화로 인해 군데군데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린 흔적이 생생합니다. 잘 가꾸어진 초록색 정원수 뒤로 대조되는 회백색 돌무더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4. 선법산(線法山) 문과 영롱한 대리석 기둥
공간 설명: 전면에 정교한 서양식 꽃무늬와 권초문(덩굴무늬)이 입체적으로 음각된 두 개의 커다란 석주(돌기둥)가 서 있고, 그 뒤로 붉은 벽돌과 석축으로 쌓은 선법산(線法山) 유적이 보입니다.

감상 포인트: 서양의 원근법(중국어로 선법)을 활용해 정원을 넓어 보이게 만들었던 인공 산 구역입니다. 불길 속에서도 대리석에 새겨진 황실 조각가들의 정교한 칼끝 장식들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침략자들의 잔혹함과 대조되는 찬란한 문화의 힘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5. 원명원의 심장, 관수법(觀水法)과 대수법의 정면 메인 아치
공간 설명: 원명원 하면 전 세계 모든 역사책과 다큐멘터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원명원 최고의 상징적 뷰입니다. 바로 황제가 앉아서 분수 쇼를 관람하던 관수법(觀水法) 자리에서 정면의 대수법 아치문을 바라본 구도입니다.

감상 포인트: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아치형 대리석 문과 로마식 기둥들이 가로로 길게 누워 있습니다. 중앙 아치의 유려한 곡선과 조각들은 완벽한 바로크 양식을 자랑합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이 아치문 뒤로 수십 미터 높이의 물줄기가 솟구쳤으나, 지금은 거대한 돌들이 관람객들을 향해 "그날의 역사적 비극을 절대 잊지 말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 엄숙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6. 석병풍(石屏风) 유적

이 유적은 바로 이전 사진에서 보았던 관수법(觀水法, Guanshufa)의 핵심이자, 황제의 어좌(보좌) 바로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대리석 병풍인 '석병풍(石屏风)' 유적입니다.

이 구도는 정면의 대수법(거대 분수)을 등지고, 당시 건륭제가 앉아 있던 황제의 시선과 위치에서 뒤쪽을 바라본 아주 흥미로운 시점입니다. 

 

1. 황제의 자리를 호위하던 5개의 대리석 병풍
사진 중앙의 둥근 대리석 무대(어좌가 놓이던 플랫폼) 뒤로 병풍처럼 반원형을 그리며 서 있는 5개의 석판이 보입니다.

황제의 등 뒤를 지키다: 중국 전통 건축에서 황제가 앉는 자리 뒤에는 항상 화려한 병풍을 두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건륭제는 서양식 분수대를 감상하는 이 야외 공간에도 그 전통을 적용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야외 특성상 나무나 비단 병풍을 둘 수 없으니, 서양식 바로크 문양을 정교하게 새긴 거대한 대리석 석병풍을 특수 제작해 뒤를 받치게 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군사 문양: 5개의 석판 표면을 자세히 보시면 일반적인 꽃무늬가 아닙니다. 청동 투구, 갑옷, 방패, 도끼, 그리고 깃발과 화살통 등 전쟁과 군사적 승리를 상징하는 서양식 무기 문양들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마민족의 상무(尙武) 정신을 숭상하고 제국의 무력과 번영을 과시하고자 했던 건륭제의 강력한 의지가 서양식 조각 기법을 빌려 표현된 것입니다.

2. 황제가 분수 쇼를 즐기던 최고의 명당
사진 앞쪽에 부채꼴 모양으로 넓고 높게 솟아오른 돌단이 바로 황제의 보좌(의자)가 놓였던 기단(플랫폼)입니다.

최고의 VIP석: 건륭제는 바로 이 돌단 위에 놓인 화려한 어좌에 앉아, 바로 정면(사진을 찍으신 질문자님의 등 뒤 방향)에서 수십 미터 높이로 솟구치며 음악에 맞춰 춤추던 '대수법'의 거대 분수 쇼를 감상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황제의 자리 좌우로는 구리로 만든 거대한 학(鶴) 조각상과 화려한 서양식 유리 등불들이 배치되어 정오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고 합니다.

3. 침략자들이 남긴 불도 끄지 못한 대리석의 위엄
1860년 영프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울 때, 황제가 앉던 나무 의자와 화려한 직물, 좌우의 청동 조각상들은 모두 약탈당하거나 재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석병풍과 기단은 통째로 깎아 만든 단단한 통대리석이었기에 불길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160년이 지난 지금도 화살통과 방패 모양의 부조 조각들이 어제 새긴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모습은, 침략의 잔혹함 속에서도 살아남은 황실 예술의 대단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대수법 아치문(5번 사진)이 멀리서 바라보는 장엄한 상징이라면, 이 관수법 석병풍은 황제가 머물던 공간의 온기와 숨결, 그리고 세부적인 예술성을 가장 가까이서 만질 수 있는 밀도 높은 유적입니다. 황제의 자리에 서서 무너진 제국의 흔적을 아주 묵직하고 깊이 있게 담아낸 것입니다

이런 폐허의 풍경은 중국이 왜 복원을 멈추고 이 황량한 돌무더기들을 그대로 노출해 두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무로 지은 동양식 궁전들은 흔적도 없이 타버렸지만, 역설적으로 "서양인들이 지어준 서양식 석조 궁전" 만은 타지 않고 남아 오늘날 서양 열강들의 침략을 고발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품이 되었습니다.


[다음 편] 베이징 천단공원 여행기 보러가기  https://peaceofman.tistory.com/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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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편] 베이징 원명원 여행기 보러가기천단공원광장 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꺼운 겨울 패딩을 입은 수많은 관람객이 기년전을 빼곡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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